지혜로워지기

성장론 VS 분배론, 한국대표학자의 강연

position 2005. 7. 3. 10:06
‘서강학파’의 태두와 ‘학현학파’의 창시자가 성장이냐 분배냐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정부주도 성장의 기초이론을 제공한 남덕우 전 국무총리와 분배를 중시하는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는 12월 17일 국회에서 ‘한국경제 사회의 제3의 길’이란 주제 아래 각각 특별강연을 했다. 남 전 총리는 “경제는 수레와 같아서 구르지 않으면 쓰러진다”며 “따라서 성장책을 쓰지 않으면 1만 달러 소득 자체를 유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변 명예교수는 북유럽 국가들을 예로 들며 “분배가 잘 돼야 국가 경쟁력이 강해지고 소득도 늘어나는 것”이라고 훈수했다.

두 석학의 강연은 각자가 걸어온 학자적 성향만큼이나 확연히 달랐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사전에 준비한 원고를 모두에게 나눠준 뒤 글자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꼼꼼히 읽어내려갔다. 강연시간도 자신에게 배정된 30분을 훌쩍 넘겼버렸다. 반면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는 미리 작성된 원고도 없이 작은 메모지에 적은 몇 개의 단어를 바탕으로 즉흥 강연을 펼쳤다. 그의 강연시간은 불과 15분 남짓. 이날 강연에서 기대했던 논쟁은 펼쳐지지 않았다.

국회 내 연구단체인 ‘시장경제와 사회안전망 포럼’(대표 정덕구 의원)이 마련한 이날 특별강연회에서 남 전 총리는 ‘한국경제의 기본 과제와 경기대책’을 강연했다. 변 명예교수는 ‘시장경제와 사회안전망’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다음은 두 원로의 강연 요지.


나는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혼돈이 정보화세계화민주화의 시대적 조류에 적응하는 과정의 진통이라고 설명해 왔다. 지금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있는 한국경제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대기업이 외국 설비와 기술을 도입해 외형 확대를 꾀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자신이 기술을 개발하고 신제품 시장을 개척하는 협곡을 지나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중소기업은 중국 경제의 충격으로 재래 제조업의 경쟁력을 상실하게 됐다. 그에 대응해 3만 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중국으로 생산시설을 옮겼다. 국내에 남아있는 중소기업들은 좀처럼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수출이 경제성장 및 대외신용 유지의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총수출의 75%인 5대 품목의 부품수입 의존도가 높아 내수 유발력이 약하고 지식 및 기술 집약적인 정보기술(IT)산업은 고용유발효과가 작다.

이런 부정적 추세에 기업과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가 오늘의 문제인데, 현 정권은 개혁의 이름으로 개입과 규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산업화 사회에서는 정부가 시장경제의 자율 기능을 무시하고 민간 활동에 불합리한 간섭과 규제를 강요하면 역작용이 생긴다는 것이 시장경제 국가들의 공통적인 경험이다.

정부는 이 시기에 시장경제의 자율 기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시장 기능이 못하는 일(시장 실패), 혹은 정부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을 해야 한다. 시장에 제동을 걸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규제를 혁파해 민간의 자조 노력을 극대화하라는 얘기다.

불황기에 정부는 사회안전망을 튼튼히 해야 한다. 재활 부조직업 훈련노인 보호 등 사회 복지 서비스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정부의 경제전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얼른 대답할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수많은 위원회가 220여 개의 ‘로드맵’을 생산하고 있는데, 정부가 모든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을 골라 그것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경제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또 국민의 관심과 에너지도 선정된 과제에 집중시켜야 한다.

경제전략으로 과학 기술 정책의 효율화, 부품 소재산업의 개발, 동북아 서비스 중심지 개발, 농업의 기업화와 과학화 등 네 가지 방향을 강조하고 싶다.

이 네 가지 장기 과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기 어렵다. 그런데 정부는 최근 경기부양을 위해 이른바 한국판 뉴딜정책을 발표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충청도 공주와 연기를 행정도시로 만드는 것이 반드시 발전전략에 맞는 것인지 의문이다. 차라리 토지공사가 토지채권을 발행해 행정수도 예정지를 전량 매입한 후 기업 도시로 개발하면 충청도와 나라가 다 같이 발전할 뿐 아니라 수도권 인구 분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논쟁이 있는데 이는 부질없는 것이다. 집권 실세 중 누군가가 1인당 소득이 1만 달러이더라도 고르게 나누면 모두가 잘 살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는데, 경제는 수레와 같아서 구르지 않으면 쓰러진다.

따라서 성장책을 쓰지 않으면 1만 달러 소득 자체를 유지할 수 없다. 소득이 1만 달러에 머물러 있는 동안 사회는 변화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하지 않으면 사회 변동에 대처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의 소득 수준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장이 없으면 분배 상태를 개선할 수 없다. 지금은 성장을 통해 실업자를 줄이는 것이 분배 개선의 최우선 과제다.

장기적으로는 경제성장에 따라 국민이 저임금에서 고임금으로 이동하고, 사회보장 제도가 발달함에 따라 소득분배 상태가 개선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
풍부한 경험, 유연한 사고
박정희 정부에서는 재무장관·경제부총리·경제특보 등을, 전두환 정부에서는 국무총리를 지낸 원로. 그를 비롯해 이승윤 전 경제부총리, 김만제 전 경제부총리 등은 모두 서강대 교수 출신으로 ‘서강학파’를 형성했다. 이들은 ‘선(先)성장 후(後)분배’ ·수출 기업 집중 지원’ 등을 통해 압축성장을 추진했다. 그는 연구실과 정책현장을 넘나들면서 풍부한 지혜를 쌓은 원로로 인정받는다. 폭넓은 경험과 유연함은 팔순에도 여전하다. 그는 서예와 디지털 사진 편집, 인터넷 검색이 취미다. 자신이 쓴 글씨들을 사진으로 찍어 컴퓨터에서 편집한다.

■ 1924년 경기도 광주 生/50년 국민대 정치학과 졸업/61년 미국 오클라호마대 경제학 박사/64년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68년 미국 스탠퍼드대 초청교수/69년 24대 재무부 장관/74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80년 14대 국무총리/83년 산학협동재단 이사장(현)/96년 동아시아경제연구원 이사장(현)


하도 시장경제, 시장경제 하니까 속이 많이 상한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말하기도 하고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인데, 이쪽으로만 흐르면 안 좋아질 수 있다. 만능이 아니라는 얘기다.

시장경제에는 결함이 있다. 흔히 시장 실패라고 부르는 것 말고도 소득과 부의 분배가 불공평해질 수 있다. 그 산물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외환위기 이후 국제화 추세가 강화되면서 소득 분배의 형평성은 더 나빠졌다. 이렇게 되면 결국 빈곤계층이 희생양이 된다. 그래서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핀란드등 북유럽 4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참 인상적이었다. 소득 불균형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북유럽 4개국이 한국은 물론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서도 낮다. 지니계수는 낮을수록 소득 분배가 양호하다. 그런데도 이들 국가의 국가경쟁력이나 1인당 소득은 다른 국가에 비해 높다. 분배가 잘 돼야 국가 경쟁력도 오르고 소득도 늘어나는 것이다.

몇 가지가 더 있데, 이들 국가의 성장률 절대 수치는 우리보다 낮다. 유럽연합(EU) 전체가 성장률이 매우 낮은 편이다. 반면 미국은 지니계수가 한국보다 높은데도 빈곤층이 별다른 불만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사회안전망 혜택이 어느 정도 확보돼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이 그야말로 노화 현상을 겪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지는 시장경제가 결코 만능이 될 수 없다는 점이고, 시장의 실패는 정부가 해결해 줘야 한다. 시장경제는 국가가 결함을 해결하면서 나가야 하는 것이지 그냥 시장 하나로만 밀어붙여선 안 된다. 이는 누구나 명심해야 할 점이다. 시장경제의 매력은 효율과 자유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시장경제가 자본주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1920년대에 등장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눌렀다. 사회주의는 결국 분배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분배를 중시하면 마치 성장을 하지 말자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답답하다. 과거 케인스는 시장경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케인시안이 아니라 마셜리안이다.

경제성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까지나 성장만 할 수 없다. 너무 성장, 성장만 외치지 말고 사회안전망과 복지에 돈을 쓰는 여유를 갖자는 거다. 고성장을 해야만 성장인가. 저성장도 괜찮다. 마이너스 성장만 아니면 된다. 아니 마이너스 성장을 해도 죽지 않는다. 한국은 80년과 98년 두 차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마이너스 성장이 되면 다 죽는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죽지 않았다. 이런 경험을 했는데도 자꾸 고성장만 고집하니 답답하다. 4∼5%만 성장해도 충분하다. 나머지는 ‘따뜻한 사회안전망’과 분배에 신경 쓰자.

성장은 국민총생산(GNP)이 얼마인가 하는 문제다. 하지만 이는 허구적인 개념이다. 소득이 1만원인 사람과 100원인 사람을 단순히 산술평균한 것으로 분배문제가 배제돼 있다. 마치 죽은 사람 목을 잘라 산 사람에게 보태주는 꼴이다. 1인당 GNP 증가율이 인구증가율보다만 크면 된다는 여유있는 사고가 필요하다. 시장경제 체제하에서는 살아남은 자와 실패한 자의 차이가 점점 커지게 마련이다. 시장경제로는 우리 사회의 이런 병폐를 결코 치유할 수 없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낙오한 패배자를 끌어안는 정책을 써야 한다. 외환위기 이후 분배구조가 그 이전보다 더욱 악화됐다. 사회 구석구석에 방치된 약자를 사회안전망으로 보호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분배구조가 악화되면 성장주도 또한 악화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성공한 시장경제 체제를 개발도상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결국 한국은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한다. 두 가지를 부탁하고 싶다. 하나는 미국의 사례, 다른 하나는 북유럽 4개국의 사례다.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경제정의분배 일관되게 추구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제학자들인 이른바 ‘학현학파’를 길러낸 인물. 박정희 정부 시절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분배경제학’을 강의하면서 ‘주류 경제학’에 만족하지 못했던 학생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1980년 전두환 정권 출범 직후 시국선언을 주도해 해직된 뒤 ‘학현연구실’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그는 경실련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창설과 활동에도 깊숙이 관여해 왔다. DJ정부 시절에는 제2건국위원회 위원장으로 기용되기도 했다. 전철환 전 한국은행 총재,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김태동 금융통화위원 등이 그의 제자.

■ 1927년 황해도 해주 生/51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68년 서울대 경제학 박사/65년 서울대 상대 교수/80년 해직/ 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94년 한국노동연구원 이사장/98년 제2의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대표공동위원장/2004년 학교법인 상지학원 이사장(현)

출처 : Forb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