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 알렉산더와 함께 내셔널리그 최다승이자 역대 최다승 3위 기록을 갖고 있는 투수. 372승으로 은퇴했으나 훗날 누락됐던 1승이 발견돼 알렉산더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3000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 중 라이벌이었던 모데카이 브라운(2.05)에 이어 역대 2위의 통산 방어율(2.13)을 갖고 있으며, 월터 존슨과 알렉산더 다음으로 많은 79개의 완봉승을 따냈다.
이밖에 방어율과 탈삼진에서 각각 5회, 다승에서 4회 1위에 올랐고, 풀타임 15시즌 중 13차례나 20승을 돌파했다. 특히 1903년부터 1905년까지는 3년 연속 30승으로 94승을 따냈으며, 1908년에 거둔 37승은 아직까지도 1900년 이후 내셔널리그 최다승기록으로 남아있다.
1880년 펜실베니아주 팩토리빌에서 태어난 매튜슨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전국구 스타였다. 당시 미국의 사내아이들 사이에서 매튜슨의 와인드업모션이 유행할 정도였다. 또한 매튜슨은 버크널대학 출신으로 당시로서는 몇 안됐던 엘리트선수였다. 대학시절 매튜슨은 학생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풋볼팀에서는 필드골 키커로 활동하기도 했다.
'매티'와 함께 매튜슨의 대표적인 별명인 '빅 식스(Big Six)'는 그가 1905년 월드시리즈에서 얻은 별명. 매튜슨은 강타선의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현 오클랜드)를 상대로 6일 사이에 3차례의 완봉승(1·3·5차전)을 따내며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매튜슨이 있었던 동안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는 월드시리즈에 5번 진출했지만, 우승은 1905년의 한차례에 불과했다. 특히 1911년부터는 3년 연속 준우승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는 매튜슨이 부진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팀타선이 그를 받혀주지 못해서였다. 또한 매튜슨은 큰 경기에서 운이 없는 투수로도 유명했는데, '머클의 본헤드' '스노드그래스의 낙구'는 모두 매튜슨이 마운드에 있었던 상황에서 나온 것들이다.
매튜슨의 최대무기는 '페이드어웨이(fadeaway)'로 불린 역회전커브(스크루볼)로 특히 커브와 완벽히 일치하는 투구폼으로 인해 타자들은 그의 커브와 역회전커브를 전혀 구별해내지 못했다.
페이드어웨이와 함께 정확한 제구력 또한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매튜슨은 통산 4780이닝에서 844개의 볼넷을 허용, 1.58개의 9이닝당 볼넷허용율을 기록했다. 현역 최고의 컨트롤투수로 꼽히는 그레그 매덕스(애틀랜타)의 허용율은 1.93. 매덕스는 지난해 72이닝 연속 무볼넷으로 매튜슨이 가지고 있던 종전기록(68이닝)을 경신했다.
매튜슨이 버니지아리그의 노포크에 있었던 1900년, 자이언츠는 노포크에 매튜슨을 데려가는 대신 1500달러를 주기로 하고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매튜슨은 신시내티 레즈가 데려갔다. 하지만 매튜슨과 자이언츠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자이언츠는 곧바로 245승의 강속구투수 에이머스 루지를 신시내티에 내주고 다시 매튜슨을 데려갔다. 당시 강속구투수로 이름을 떨쳤던 루지는 어깨 부상으로 신시내티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은퇴했다. 이 '루지-매튜슨 트레이드'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대의 트레이드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매튜슨은 풀타임 첫번째 시즌인 1901년 페이드어웨이를 앞세워 20승을 따냈지만, 이듬해 호레이스 포겔 감독은 매튜슨을 3루수나 유격수로 전환시키려했다. 그러나 시즌이 끝나기전 포겔 감독이 해임됐고, 포겔의 뒤를 이은 존 맥그로 감독은 매튜슨에게 마운드를 보장해줬다. 매튜슨은 1903년 30승을 올리며 맥그로 감독의 기대에 보답했다.
1915년 매튜슨이 8승으로 추락하자, 이듬해 중반 자이언츠는 매튜슨과 외야수 에드 로시, 3루수 빌 맥케니를 신시내티로 보내고 3루수 겸 감독이었던 벅 허조그와 외야수 레드 킬리퍼를 받아왔다. 신시내티로 간 로시와 맥케니는 이후 명예의전당에 오를 정도로 명선수로 성장했다. 이번에는 자이언츠의 트레이드 실패였다.
1916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은 매튜슨은 이듬해부터 신시내티의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1918년 대위 계급장을 달고 나간 1차세계대전에서 신경가스를 맞았고 이로 인해 2년 후 요절했다.
매튜슨은 1936년 타이 콥, 베이브 루스, 호너스 와그너, 월터 존슨과 함께 최초로 명예의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안았다.
비겁자가 되지 말아라..
미국의 야구인들은 그를 일컬어 " 신의 야구:라 칭하는데 그가 존경을 받고 있은 경우 그의 야구 실력이 이 처럼 뛰어나서도 이지만 그가 남긴 기록 때문만이 아니다.
1918년 당시 38세의 매튜슨은 세계 1차 대전에 참전을 선언하고 프랑스 동부전선에 투입된다.
그의 신분과 나이 때문에 이미 병역을 면제 받은 상황이었고 계속해서 야구선수를 활동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가야 하는 길을 특별한 이유를 만들거나 자신의 상황을 합리화하며 의무를 회피하는 비겁자가 되지 않겠다" 라며 자원 입대한 것이다.
그러나 매튜슨은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에 노출되며, 폐가 크게 손상되었고 평생 깊은 기침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야구를 그만두게 되었으며, 여생을 병상에서 고통받다가 4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나는 결코 야구든, 인생이든 비겁하지 않았다" 라고 하며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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