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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과 중국

position 2006. 1. 11. 11:21

삼성과 중국

- 거대한 미래에 도전하라 -

김유진 지음

동양문고 / 2005년 9월 / 308쪽

 

저자  김유진

1940년 경북 포항 출생으로, 경주중학교와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삼성물산 자카르타 지점장, 삼성그룹 중국지역 총괄부사장, 삼성물산 고문, 삼성그룹 중국 본사 사장을 역임했던 삼성의 중국시장 개척자로, 중국인에게 대표적인 한국기업을 대라면 주저 없이 싼싱(삼성)을 꼽는 것도 그의 공로라면 공로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전경련 중소기업 경영자문위원, 한·중 경제발전협회 고문으로도 활동 했고, 수출유공석탑산업훈장과 상해임시정부청사 복원 유공 국무총리 표창 등을 받았다.

 

Short Summary

중국은 13억 인구를 가진 거대 시장이라는 매력으로 이미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고, 세계는 갖가지 방법으로 중국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자자는 이 책에서 우리에게도 중국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 시장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시장- 으로, 어떤 식으로 가느냐가 문제인데, 과거 우리가 생각했던 우회기지의 개념에서 탈피해, 철저한 현지화가 요구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중국 시장에서 이룩한 삼성 성공신화기가 진출기부터 현재까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고, 왜 중국이 삼성에 열광하고 있는지도 언급되어 있다. 첨부되어 있는 부록은 중국 경제개황 및 경제정책, 최근 20년 발전상황 및 향후 50년 전망, 중국 경제 발전 계획 성패 요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국시장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참고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차례

프롤로그

 

1장  한국경제의 디딤돌 중국

2장  중국의 오늘, 그리고 내일

3장  삼성, 대륙에 닻을 내리다

4장  새로운 중국신화를 일구다

 

에필로그  해외사업의 선봉에 서서

 

부록 1  중국 경제개황 및 경제정책

부록 2  최근 20년 발전상황 및 향후 50년 전망

부록 3  중국경제 발전계획 성패요인

 


삼성과 중국

- 거대한 미래에 도전하라 -

김유진 지음

동양문고 / 2005년 9월 / 308쪽

 

1장  한국경제의 디딤돌 중국

 

중국경제의 주요 이슈들

첫 번째 이슈는 과열된 중국경제의 연착륙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이고, 두 번째 이슈는 미국 및 EU가 지속적으로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위안화 절상 압력이며, 세 번째 이슈는 시장개방 확대이고, 네 번째 이슈는 세대교체이다. 이 외에도 중국경제 성장에 따른 중국의 글로벌 영향력 확대와, 고도성장 이면에 놓여있는 사회경제적 불균형 확대 현상도 중국경제의 주요 이슈들이다. 그리고 구조적인 요인들로 인해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실업문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중국정부의 과제이다.

 

중국사업의 전략과 방향

북경대 브랜드연구소가 중국 도시 거주자 5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삼성이 중국 내 소비재 브랜드 가치 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제 삼성은 중국에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주요 비결로는 철저한 사전준비, 현지기업과 파트너십 구축, 고급브랜드 이미지 전략, 현지 채용인에 대한 적극적인 교육투자, 기업시민의식 함양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삼성그룹이 중국사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중장기 비전은, 내년까지 제2의 글로벌 사업기지로 키우면서, 2011년경에는 중국에서 제2의 삼성그룹으로 자리 잡도록 육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향후 중국 내에서 초일류기업으로 자리 잡겠다는 것이 삼성의 장기비전인 것 같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중점 추진전략으로 현지완결형 경영체제를 구축해 기업의 현지화 강화, 우수한 현지 인력의 확보와 양성, 중국인들에게 사랑받는 기업이 되기 위한 부단한 노력, Win-Win(상생)전략에 의한 사업 인프라 구축 등을 들 수 있다.

 

21세기 중국의 숨은 복병들

2004년 4월 28일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 유럽순방을 앞두고 있을 때, 중국경제의 과열상태를 언급하면서 정책적 조정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중국금융감독위원회는 곧바로 민영은행의 신규대출을 5월 1일까지 한시적으로 중지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 순간 세계 주식시장이 큰 폭으로 요동쳤다. 소위 차이나 쇼크의 서막이 열렸던 것이다. 원자바오의 발언이 차이나 쇼크로까지 번진 데에는 세계경제의 유가, 물가, 금리 추세와 관련이 있다.

 

사실 중국경제의 급속한 성장은 경제자원의 세계적 공급 불안을 부추기는 중요한 원인이다. 그 중에서도 재생불능 자원의 공급문제는 갈수록 심각한 상황이다. 작년 중국의 하루 원유생산량은 약 340만 배럴이었고, 소비량은 약 620만 배럴 정도였는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소비량 증가율이 생산량 증가율보다 훨씬 높다는 데 있다. 석유와 함께 경제발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물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또 한 가지 중국경제의 현안은 경제성장에 따른 지역간 불균형 문제인데, 동부의 발전지역, 중부의 상대적 낙후지역, 서부의 낙후지역 사이의 격차는 최소 15~20년에 이르고 있다. 아울러 국유기업 개혁문제 역시 난제 중의 난제인데, 국유기업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으로는 기업 규모들이 작다는 것과 제품구조의 열세를 들 수 있다. 참고로 현재 중국은 100% 국유기업 체제에서 10% 국유기업 체제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있는데, 이 과정에서 약 6조 7,8천억 위안 상당의 부실채권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정부의 입장은 낙관적인데, 이 비용을 국유기업을 비국유기업으로 개조하면서도 급격한 사회변동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대가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중국투자의 허와 실

한국과 중국은 1992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래, 정치와 경제, 문화와 과학기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괄목할 만한 교류와 발전을 이루었다. 대 중국투자측면에 있어서도 한국의 비중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중국 러시가 성공으로 이어지는가는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중소기업이 중국에 투자하는 목적은 시장 확보와 저렴한 인건비, 세제상의 우대혜택, 원자재 확보가 용이하리라는 점 등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그러한 매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인건비의 경우에도 직접 인건비에 사회보장비용, 노동생산성, 운송비 등 제반 생산요소들을 모두 고려해 보면, 중국의 인건비도 결코 만만한 액수가 아니다. 또 외국인 투자기업들에게 주었던 우대혜택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아울러 세제혜택의 경우에도 제한조항이 많다. 원자재 수급 문제도 마찬가지이고, 중국 진출기업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전력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전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충분히 해결 가능한 문제들이다. 굳이 전문신용평가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현지 사정에 밝은 기업의 경험을 참조하는 것 -코트라나 무역협회, 중소기업진흥공단 등 중국에 상주하고 있는 기관들의 도움을 받는 것- 도 좋은 방안이다.

 

경제발전과 주요 산업 전망

중국은 그동안 최대한 많은 종류의 제품들을, 많이 생산하는 것에 역점을 두어왔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단순 생산구조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예로 중국 정부는 중국을 전자강국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다양한 지원책들을 내놓고, 각종 법규들도 정비해 나가고 있다. 중국의 전자산업은 2004년 총 생산액이 2조 6천5백억 위안에 달할 만큼 급속한 발전을 계속해 왔는데, 컬러TV, 휴대폰 등의 생산량은 이미 세계 1위 규모이다. 향후 5년간 중국 전자산업은 연평균 20%의 성장을 지속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고속발전의 견인차는 컴퓨터 제조업과 통신설비 제조업이다.

 

또 중국의 금융시장도 개혁개방을 거치면서, 증권시장, 화폐시장, 은행 간 외환시장 등 기본적인 체계는 모두 구축되었고, 증권시장의 발행규모나 시가총액, 유통시장의 가치, 거래액 등도 급신장되고 있다. 아울러 향후 대외개방 확대 및 금융업 발전에 따라, 합병 등의 구조조정 작업도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작년 중국의 자동차생산량은 507만 대로,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4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올해의 자동차시장 규모는 약 580만 대로 예상되고, 아마 내년부터는 공급이 수요를 초과할 것으로 예측된다. 현재 중국의 자동차산업은 수입관세율 인하에 따른 외국회사들의 가격경쟁력 강화와, 수요위축에 따른 저가경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에서 기업가가 된다는 것은

중국에서 기업가로서 지녀야 할 소질로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갖추어야 하고, 선택에 있어서 대담성을 갖추어야 하며, 조직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에 중국의 기업가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자질이 필요하다. 그것은 기업가가 특이식물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생장환경에서 자라나는 식물이 아닌, 사회주의 체제의 가뭄이나 홍수, 고온과 엄동설한에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식물- 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기적 협력관계 구축이 핵심이다

지난 십여 년의 중국 주재원 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참고했으면 하는 바를 10가지 정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어디에 내놓아도 자신 있는 전략 품목이나 앞선 기술을 가져야 한다. 둘째, 사업상 관시(關係)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법사는 아니다. 셋째, 중국의 법, 규정을 지키고 정도 경영을 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넷째, 중국과 중국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중국에서 성공할 수 없다. 다섯째, 항상 중국의 역사와 문화, 사회를 깊이 연구하는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여섯째, 조선족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면 큰 도움이 된다.

 

일곱째, 중국인은 대체로 현실적이며 실용주의자들이다. 여덟째, 중국인들은 냉정하게 거래에 임하며, 이해득실의 계산에도 빠르다. 아홉째, 서둘러 성공하려고 하지 마라.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열 번째, 지혜롭지만 어수룩한 척하고, 기교가 뛰어나도 서툰 척하고, 강하나 부드러운 척하는 것이 중국인이 도달하고 싶어 하는 처세의 경지이므로, 때때로 완전히 멍청해 보이는 것도 보약이다.

 

2장  중국의 오늘, 그리고 내일

 

후진타오를 알면 중국이 보인다

지난 3월 13일 중국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 후진타오 중국 공산당총서기 겸 국가주석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했는데, 이로써 후 주석은 당, 정, 군의 권력을 모두 장악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다. 후진타오가 이끄는 제4세대의 특징은 1940년 전후에 태어나 문화대혁명 이전에 입당했다는 점인데, 이들은 이과(理科) 계통 엔지니어 출신의 테크노크라트가 대부분이다. 또 1960년대에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도 이들의 특징이고, 무력투쟁을 통하지 않고 윗선에 의해 발탁되었다는 점도 4세대의 중요한 특징이다.

 

현재 후진타오를 받치고 있는 인맥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그룹은 50년대 이후 차관급 동문만 3백 명 이상 배출한 칭화대 학맥으로 중국 내 서열 2위인 우방궈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장, 황쥐 부총리, 쩡페이엔 부총리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그룹은 송핑을 맹주로 받들었던 감숙성 군단인데, 원자바오 총리, 지아즈지에 상무위원, 천광이 전인대 상무위원 등이다. 셋째 그룹은 공청단 인맥인데, 당 차세대 주역들인 리커창 허난성 성장, 저우창 공청단 서기, 왕자오궈 통일전선부장, 쑹더푸 푸지엔성 서기, 왕러취안 신장위구르 자치구 서기 등이 이에 속한다. 집권 2기를 맞은 후진타오는 크게 세 가지 국정이념을 제시하고 있는데, 민중의 이익을 중시한다는 인본주의, 균형발전을 의미하는 과학적 발전관, 그리고 조화로운 사회가 그것이다.

 

21세기 중국이 지향하는 미래

중국정부는 제16차 당 대회에서, 2050년까지 전면적인 샤오캉 사회 -국민의 대다수가 중류층 이상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함- 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샤오캉 사회는 단순히 경제건설 및 개혁에 대한 새로운 목표설정이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은 물론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중국 사회가 지역간, 도농간, 계층간 갈등을 넘어서 견실하고 전면적으로 발전하도록 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샤오캉 사회 건설의 가장 큰 장애는 바로 인구문제인데, 중국정부의 공식 통계로는 13억 명이지만, 실제 민간조사기관들은 이미 16억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최근 중국정부는 2020년의 총 인구를 15억 명 이내로 통제하겠다고 발표했는데, 그 정도로 인구를 제한해야 샤오캉 사회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인식 아래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장쩌민의 3개 대표론 -중국공산당이 선진생산력, 선진문화의 발전 방향, 광범위한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겠다는 것- 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역설하고 있다.

 

한편 중국정부가 일본을 제치고 세계2위의 경제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제도변화가 필요하다. 국제정세의 변화와 국민들의 욕구에 부응하도록 공산당의 지도방식을 개선하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공산당이 국가발전의 선봉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종 제도와 권력구조의 평형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데, 후진타오가 3개 대표론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역설하는 것은 이러한 평형점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정치적 민주주의 문제도 중국의 21세기를 전망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흔히 중국을 비판하는 주장에 공통적으로 담겨있는 시각은 일당독재와 인권문제인데, 이에 대해 중국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중국공산당은 민주정치가 법치국가의 기본요소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그것은 비효율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반면에 전제정치는 효율이 높기 때문에, 독재자라 해도 일을 잘하면 좋은 정치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1인당 국민소득이 3,000 6,000달러에 이르렀을 때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그 이전에 민주화되면 결국 독재체제로 변모하여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함께 고사하고 만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환경오염 역시 중국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인데, 현재 중국은 전력공급의 80% 이상을 석탄과 석유 등의 화력발전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엄청난 양의 아황산가스 배출로 이어지고 있어, 후난성 성도 창사 시의 주민들 대부분은 일상적으로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할 정도다. 또 중국인들이 어머니 강이라고 말하는 황허강 하류는 최근 들어 강바닥이 말라버리는 기간이 1년에 200일을 초과하고 있는데, 말라버린 바닥의 진흙과 모래는 황사 현상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요인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의 환경오염은 단순히 국내의 문제가 아니라, 인근 국가들, 특히 한반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인데, 이러한 문제를 단기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데 고민이 있다.

 

중국 경제의 유망업종은

중국에 진출하는 기업들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경쟁력 있는 전략상품의 선정이다. 중국은 세계 500대 기업들 거의 대부분이 진출해 있을 정도로 치열한 경제전쟁터이기 때문에, 좋은 품질의 제품을 싸게 공급하겠다는 생각으로는 더 이상 중국진출의 메리트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현재 중국의 주요 구매층은 샤오황띠라 불리는 젊은 층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X세대쯤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중국정부의 강력한 <한 가정 한 자녀> 산아제한 정책으로 태어난 세대인데, 개성이 강하여 독립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상품의 질을 중시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선호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교육수준도 높아 수입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소비로 인해 은행예금이 별로 없다. 흔히 부모와 함께 살면서 생활비는 최소로 쓰고, 대신 수입의 대부분을 패션, 여행, 사교, IT제품 등에 지출하고 있는데,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은 이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사업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또 한 가지 중국진출에 있어 유의할 점은 안정적인 유통망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철저한 시장조사와 수익성을 검토한 뒤에 들어가야 하는데, 핵심은 항상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미래,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국경제의 오랜 화두인데, 전통적으로 중국에 대한 생각은 두 가지로 대별되는 것 같다. 하나는 중국을 기회의 땅으로 보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위협적인 잠재적인 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한편 중국의 앞날에 대해 우려의 시각이 없는 것도 아닌데, 머지않아 경제파탄으로 국가적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주장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심지어 중국이 남미화 현상을 보인다는 주장 -외국자본에 의지해 고속성장을 유지하다가, 세계적 구조조정으로 외자기업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되면,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될 것- 도 꼬리를 물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향후 중국경제에는 긍정적인 요소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사실 중국은 정치체제가 공산당의 일당독재라는 것 말고, 나머지는 서구의 시장경제와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중국공산당 역시 스스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개혁의 걸림돌이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된다.

 

현재 중국정부가 생각하고 있는 장기적 경제성장 동력은 정보화와 결합된 산업의 고도화 및 산업의 지리적 재배치, 상대적으로 낙후된 서비스 산업의 육성, 민영기업의 발전, 도시화 촉진을 통한 소비활성화 등이다. 이러한 성장 원천들이 경제성장 및 고용창출 효과를 만들어낼 요소임은 분명해 보이는데, 중국 정부가 향후 20년간 7% 이상의 경제성장에 대해 낙관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3장  삼성, 대륙에 닻을 내리다

 

싱글 삼성의 깃발로

삼성그룹이 중국 진출을 검토한 때는 1985년 가을 경이었다. 이병철 선대회장 주재로 관련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삼성물산 이필곤 부사장이 중국시장의 현황과 진출 방안에 대해 보고를 한 후, 본격적인 토론이 이어졌고, 회의가 끝날 무렵, 이병철 선대회장이 특유의 경상도 말씨로 중국은 하나로 가는 기다. 물산, 제당 따로, 전자 따로 할 거 없다.라고 종합적인 결론을 내렸다. 즉 <싱글 삼성>으로 사업을 전개하라는 것이 회장님의 지시였다. 그날 회의가 끝난 직후, 그룹은 본격적인 중국 진출 계획 수립에 들어갔고, 삼성물산 홍콩법인이 단일 창구로 결정되었다.

 

필자가 홍콩지역 총괄 임원으로 부임한 것은 1985년 초였는데, 업무파악이 끝나자 가장 먼저 실행한 것이 조직 정비작업이었다. 각 관계사로 흩어져 있던 주재원의 대외적 신분을 <삼성물산 홍콩유한공사> 직원으로 통일시켰다. 각종 계약과 홍보물들도 삼성물산 홍콩법인 명의로 했고, 명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중국 총괄 임원으로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중국대륙 안에 사업교두보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당시 중국과의 교역은 주로 홍콩의 중개상을 통해 추진되고 있어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직접 본토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는데, 중국정부로부터 비자를 받아내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였기 때문이다.

 

비록 중국 입국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사업은 계속 진행되었는데, 1986년 여름 삼성은 북경에 <성진유한공사>라는 이름으로 삼성그룹 최초의 연락사무소를 개설했다. 외교관계가 없었으므로, 한국기업 명의로 북경에 정식 사무소를 설치할 수 없어, 홍콩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 후, 북경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북경에는 한국계 미국인 카렌 한(Karen Han) 여사가 삼성전자의 중국 현지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5년 10월경, 삼성물산 본사 안덕기 부사장이 아시아 태평양 품질관리대회(APQCO) 참석 초청을 받아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삼성물산 이필곤 대표이사가 아·태 국제무역 박람회(ASPAT) 참석차 북경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이 대표는 방문기간 중 중국북방공업공사측과 양사의 협력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이처럼 본격적으로 기업차원에서 중국방문이 실현되면서 중국비자를 받을 가능성도 높아졌고, 결국 1986년 7월 회의 참석의 형태가 아닌 상담을 위한 중국 입국이 실현되었다. 중국석탄수출입총공사에서 정식으로 초청하겠다고 연락을 보내왔던 것이다. 당시 나와 함께 입국했던 분들은 동양시멘트 사장, 채오병 삼성물산 전무, 실무 담당자인 석동균 과장(홍콩 지사) 등이었다.

 

중국진출 3단계 전략

중국은 1983년의 민항기 사건으로 한국정부와 첫 대면한 이후,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갖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도 민항기 피랍사건은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이 한국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당시 피랍승객들은 서울의 특급호텔에 수용되었는데,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서울에는 초가집과 거지들만 우글거려야 정상이었는데, 고층빌딩들과 도로를 가득 메운 엄청난 양의 한국산 자동차 물결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중국은 1986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 기꺼이 참가했고, 그 뒤 88년에 있었던 서울올림픽도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발전상을 알리는 큰 기회가 되었다. 서울올림픽이 끝난 후부터는 1년 중 절반을 중국에서 체류했다. 한국에 우호적 분위기가 만들어진데다가, 중국정부가 정경분리라는 실용적 사고를 갖기 시작하여, 비자발급이 수월해졌기 때문이었다.

 

삼성그룹의 중국 진출과정은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거점 확보 및 경험축적의 기간으로서, 대략 1985년부터 1990년까지인데, 이 기간에는 <선 교역, 후 투자> 원칙에 따라, 상품교역을 통해 우호관계를 구축하고 시장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두 번째 단계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인데, 이 기간에는 대 중국 투자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21억 4천만 달러를 투자하여 19개 생산법인을 설립했다. 세 번째 단계는 2000년 이후로 볼 수 있는데, 참고로 2000년 전후로 중국내 삼성의 전 생산법인이 흑자를 기록하면서 경영이 정상화되었다. 이 시기의 특징이라면 IT제품을 중심으로 삼성의 이미지가 최고급 브랜드로 도약했다는 점이다. 특히 애니콜은 중국 소비계층 사이에서 가장 갖고 싶은 제품으로 선정되었고, 모니터도 중국 국내시장 점유율 1위(M/S 28%)에 올랐다.

 

스포츠 마케팅의 선구적 발걸음

중국 진입 초기에는 구체적 사업성과보다는 삼성의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데 주력했는데,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체육대회의 타이틀 스폰서 등을 통한 브랜드 인지도 제고였다. 당시 서울올림픽에서 중국이 얻은 메달들은 수영과 탁구, 체조였는데, 중국정부는 특히 체조가 앞으로 유망하리라 판단하고 집중 육성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1989년 초, 중국 신화통신사 홍콩 계열회사 하나가 삼성이라는 브랜드를 알리는 방안의 하나로, 중국체조대회의 타이틀 스폰서 여부를 타진해 왔다. 나는 즉시 서울 본사에 사업추진을 요청했다. 본사에서도 괜찮은 방안이라며, 지원을 약속했다.

 

비록 한국의 체조팀은 초청 받지 못했지만, 1989년 4월 28일 북경에서 <1 三星 中國 國際體操大會>가 개최되었다. 서울올림픽에 출전했던 동유럽 선수들과 동남아시아, 일본 등의 체조선수들이 상당수 참여해 치열한 경합을 벌였는데, 우승은 개최국의 이점을 살린 중국 체조팀에게 돌아갔다. 대회 개최 후 만난 중국 관리들의 태도에서, 과거와 달라진 삼성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때는 관람객용 모자, 공항의 푸시카트 및 TV BOX 등 570만 달러를 협찬하는 등, 이후에도 삼성의 스포츠를 통한 마케팅 활동은 계속되었다.

 

오늘의 시행착오, 내일의 성공

주위 환경이 발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 맞서, 삼성 역시 중국시장에 대한 접근을 가속화할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후발주자라는 불리한 조건에서는 보다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일단 합자형태로 공장을 운영해보면서 중국 상황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그것이 89년에 심천에서 TV공장을 운영하게 된 배경이었다. 투자주체는 삼성물산이었고, 기존 회사의 지분을 인수하여 경영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투자는 5개 회사가 합자하는 다자합자 방식이었는데, 중국 쪽에서는 SEG그룹이 참여했고, 홍콩계 기업이 두 곳, 말레이시아 교포기업이 참여했다. 삼성의 투자금액은 110만 달러(19%지분)였고, 사업은 단순했는데, 한국에서 부품을 수입해 공장에서 조립한 후 미국 등 제3국으로 수출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막상 공장 증설작업에 들어가자, 예상치 못한 문제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근로자들에 대한 사회보장비용이 추가되어 예상했던 인건비의 30%가 더 지불되었고, 중국의 경리나 노무, 회계제도도 우리 예상과는 너무 달라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우여곡절을 통해 본격적으로 공장이 가동되었는데, 또 다른 문제점들이 발생했다. 다섯 개 회사가 동일 지분을 가지고 있다 보니, 결정과정이 매우 복잡했고, 예상보다 경영성과가 저조했으며, 개선의 가능성도 없다고 판단되었다. 결국 우리 지분만큼의 경영권을 중국 측에 넘겨주고, 지분만 유지하는 선에서 손을 뗐다. 값비싼 수업료였다.

 

중국진출을 본격화하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은 89년의 천안문사태로 인해 정치사회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미국정부를 비롯해 각국 정부들은 중국과의 기존 협력을 재검토했고, 언론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중국을 비난했다. 사태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정확한 방향타 없이 중국 경제가 표류하고 있었는데, 중국 공산당 역시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가고 있는 길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총서기에 오른 장쩌민도 중앙에서의 기반이 취약하여, 그의 능력으로는 보수파와 개혁파로 갈라진 내분을 수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덩샤오핑은 1992년 1월 초, 88세의 노구를 이끌고 우창, 심천, 주하이, 상해 등을 시찰했는데, 생애 마지막 시찰이 될 순회에서, 그는 일련의 연설을 통해 중국사회에 대한 전면적 정치적 각성을 촉구했다. 이것이 향후 중국 개혁개방 정책의 이론적 토대가 된 남순강화(南巡講話)인데, 개혁개방이 자본주의의 길인가 아닌가는 핵심문제가 아니라는 그의 연설은 모든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했고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덩샤오핑의 지침을 체계화한 것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이론이다.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개방의 흐름을 다잡을 무렵, 삼성의 중국진출에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한중수교로 한국기업들이 중국에서 합법적으로 사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진출한 삼성관계사는 1992년 천진 경제특구에 진출한 천진코닝이었다. 뒤이어 삼성전기가 동관시에 동관전기를 설립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중국투자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한편 중국에 대한 투자가 본격화되었을 무렵, 중국 석유화학산업의 대표적 기업인 지린화학에서 에틸렌 공장을 대규모로 증설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당시 삼성은 대산 공업단지에 삼성석유화학 공장을 가동하고 있었고, 그동안 쌓아놓은 인맥들도 잘 활용하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삼성물산과 삼성엔지니어링이 컨소시엄을 형성해 참여하기로 했다. 또 에틸렌을 추출하는 방법 중 독일의 린데라는 회사가 보유한 기술이 가장 나은 것으로 평가되어, 린데도 컨소시엄에 참여시켰다.

 

현실적인 경쟁상대는 일본이었지만, 린데의 에틸렌 추출기술이 일본보다 선진적이라는 것이 장점이었고, 공사금액도 우리가 저렴하게 책정하여 가격경쟁력에서도 밀리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공사에 대한 신뢰감이었다. 그래서 관계자들을 여러 차례 한국으로 초청해서 직접 삼성석유화학을 견학토록 조치했다. 공장 구석구석을 안내하면서 프로세스를 일일이 설명했고, 기자재들도 대부분 국내에서 직접 생산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92년 9월 드디어 에틸렌플랜트를 따낼 수 있었다. 금액은 1억 8천만 달러였다. 당시 한국기업이 수출한 플랜트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여기에 더해, 다음 해에는 EO(Ethylene Oxide)/EG (Ethylene Glycol) 플랜트 건설 프로젝트도 수주할 수 있었다.

 

4장  새로운 중국신화를 일구다

 

중국전역에 생산거점들을 확보하고

삼성중국본사는 크게 세 가지 기능을 수행했다. 첫째는 중국에서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각종 대외사업 활동에서 그룹을 대표하고 인맥을 관리하며, 중국사업 전략을 수립하고 지원하는 활동이 그것이었다. 둘째는 중국전략 구상 및 기획 기능도 중국본사의 핵심 업무였다. 중요 정보를 수집해서 관계사가 공유토록 하고, 그룹 홈페이지도 운영했다. 인맥관리, 대외 협력, 홍보 전략을 수립하고, 그 활동을 지원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셋째는 인사, 세무, 금융, 전산 등 전문기능을 통해 그룹사업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중국 내수시장의 영업이나 개척은 각 관계사의 고유 업무였지만, 세무나 금융, 노사관계 등은 중국본사에서 지원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편리했다.

 

그 외 삼성의 브랜드 이미지 제고와 지역사회 공헌활동도 중요했는데, 청소년들에게 삼성의 이미지를 심기 위해, <삼성 디지털 지력쾌차>라는 CCTV 장학퀴즈 프로그램을 지원한 것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청소년들을 위한 장학사업이면서도, 미래고객들에게 브랜드 호감도 및 로열티를 높여가는 부수효과도 거두었다. 스포츠 마케팅을 통한 브랜드 이미지 제고작업도 지속적인 관심사항이었는데, 2000년 7월에 열린 삼성 디지털 배 한중 국가대표 축구대회, 한중 청소년 축구대회, 한중 프로팀 축구대회 등은 축구를 좋아하는 중국인을 위해 적극적으로 실시한 축구마케팅들이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삼성그룹이 본격적인 중국투자를 시작한 것은 1992년이었고, 그 후 생산법인들의 중국 러시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중국에 설립한 현지법인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가격경쟁력을 잃은 중저가 제품들과 그 부품들을 생산하는 공장들이었고, 중국에서 생산하여 한국으로 재수출하거나, 제3국으로 수출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한편 10년 앞을 내다보는 장기 포석으로, 중국지역전문가들의 파견 작업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는데, 현재 삼성의 중국사업을 이끄는 핵심인재들은 대부분 90년대 한중수교 직후부터 중국을 돌아다녔던 지역전문가들이다. 당시 1인당 수천만 원씩 투자하여 보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한 결과가, 삼성 중국 사업의 성공스토리로 되돌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신시장을 알면 중국이 보인다

삼성그룹이 중국사업전략을 적극적으로 수정하게 된 계기는 중국시장에서의 애니콜 단말기 성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애니콜의 성공을 통해 급변하는 중국시장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었고, 어떤 사업전략이 적중할 것인지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어느 나라든 경제성장 과정에서 통신 산업의 발전은 필연적인데,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엄청난 자본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유선전화 설치사업은 참으로 지지부진했다. 이런 면에서 구입과 동시에 사용이 가능한 무선전화의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삼성의 중국 전략은 국내 생산을 보조하는 제2공장 전략이었다. 그에 반해 일찍이 진출한 선진기업들은 선점 효과를 발휘하여 성장하는 내수시장의 열매를 고스란히 챙기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모토롤라였는데, 1980년대 후반 중국정부는 통신기간망 현대화를 위해 모토롤라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는데, 그 결과 중국정부는 통신 산업 전반에 대한 국제적 안목과 정책능력을 배양할 수 있었고, 대신 모토롤라는 각종 사업상의 특혜를 받아냈다.

 

참고로 중국정부가 무선전화 통신망 건설을 국책과제로 선정한 때는 1990년대 초 경으로, 당시 국제적으로 보편화된 통신 방식은 유럽에서 표준화된 GSM(Global System for Mobile communications)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높은 통화품질과 저렴한 사용요금, 그리고 국제 로밍과 ISDN과의 호환성이 강점이었는데, 중국정부는 GSM방식을 표준으로 채택했다.

 

중국의 이동통신사업은 정보산업부에서 정책을 수립, 관리 감독하고, 통신사업자 역시 중국정부가 직접 관장하고 있다. 현재 시장점유율 1위인 차이나텔레콤은 정보산업부가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제2사업자인 차이나유니콤은 전력, 전자, 철도부서가 주축이 되어 설립했다. 기간망은 정부가 직접 개입한 반면, 휴대폰시장은 개방되어 있었다. 당시 중국 휴대폰시장은 모토롤라, 에릭슨, 노키아 등이 단연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삼성도 GSM방식의 휴대폰을 중국시장에 판매 중이었다. 그렇지만 수입쿼터가 정해져 있어서 시장점유율을 확대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준비하는 자에게는 언젠가 기회가 오기 마련인데, 그것은 예상보다 빨리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CDMA(Code Division Multiple Access: 부호분할 다중접속) 방식이 그것이었다. GMS방식은 근본적으로 한계 -사용자가 많아지면 통화 중 끊김 현상이 빈번해지고 착신이 힘들어짐- 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CDMA방식은 전혀 그런 문제가 없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사용자 문제에 고민하던 중국정부는 결국 CDMA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정부는 CDMA표준에 대한 검토를 끝낸 후, 장성공사를 설립하여 CDMA망 건설을 통한 서비스를 전담 운영토록 했는데, 이 회사는 각 지역 전신국과 인민해방군이 50:50으로 합작한 사업체였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수주 전에 뛰어들었는데, 우선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및 산하 통신지원반 등 광범위한 협조체제를 구축했고, 동시에 각 지역 전신국을 접촉하여 장성공사에 파견되는 인력을 중심으로 섭외를 시작했다. 마침내 1996년 하반기 중국정부는 4개 지역(상해, 북경, 서안, 광주)의 시범 망 사업대상 업체를 선정했는데, 이에 삼성은 모토롤라와 함께 입찰자격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모토롤라와 치열한 입찰협상을 벌여 최후의 접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정식으로 상해지역의 시범사업을 수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뻐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넘어야 할 산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본격적인 CDMA 상용망 건설사업을 목전에 두었을 때, 중국정부 일각에서 인민해방군이 일반통신 서비스업을 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결국 주룽지 총리의 강력한 개입으로 인민해방군은 통신사업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CDMA 망 사업을 추진하던 장성공사가 전격적으로 해체되었다. 우리와 장성공사 사이에 진행되었던 모든 프로젝트들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을 CDMA추진팀이 아니었다. 배승한 과장(현 삼성전자 상무)이 주축이 된 사업추진팀은 중국정부의 정책과 실제 사이의 공간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거의 불법화 되었던 CDMA 망 건설사업을 특별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전환시켜내고, 마침내 1999년 치열한 입찰경쟁에서 루슨트를 따돌림으로써, 삼성전자는 CDMA분야의 세계적 기술선도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참고로 주룽지총리가 주관한 이동통신 구조조정은 2000년에 마무리되었고, CDMA 망 건설사업은 장성공사로부터 사업권을 넘겨받은 차이나유니콤이 주관하여 재개되었는데, 우리는 거기에도 참여하여 좋은 결과를 얻어내어, 결과적으로 삼성은 총 4개의 성에서 1억불 상당의 물량을 수주하게 되었다. 지역판매권 역시 당초 4개 지역에서 감숙성, 북경시 등이 추가되어 총 6개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현재는 가장 최신기술인 CDMA-EV/DO제품에 대한 시범망 사업을 신규지역을 대상으로 확대하고 있다.

 

석유가스개발은 국가적 사업이다

85년에 중국총괄본부 대표로 파견된 이래 10년 동안 중국사업에만 매달렸다. 그러다 보니 국내 실정에 어두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본사에서는 국내에 들어와 재충전하라며, 본사 부사장으로 발령을 내주었다. 역할은 해외주재원 생활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프로젝트 담당이었다. 처음에는 기계 플랜트 프로젝트에 간여했다가, 석유가스 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했고, 프로젝트 담당 부사장으로 2년을 보낸 후인 97년 조직개편이 단행되었다. 필자 역시 후진들을 위해 현직에서 물러나, 그룹의 대외협력 업무를 수행하는 상근 경영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국관련 사항이나 그룹 차원에서 대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으면 수행했다. 또한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의 고위관계자들과의 면담주선이나 중요한 자리에 배석해 조언을 해주는 것도 내 몫이었다.

 

중국보험시장을 열다

후진들을 위해 현직에서 물러날 당시 필자는 성균관대학교 통상대학원 석사과정(중국지역)에 등록을 마치고 3월 초 개강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룹 구조조정본부에서 중국본사 사장으로 나갈 수 없겠느냐고 제의를 받았고, 4년 만에 다시 들어간 중국은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로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삼성그룹은 총 22개 생산법인에 투자액만 22억 달러에 이르는 수준이었는데, 임직원들은 중국 내수시장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 하는 과제로 씨름하고 있었다. 핵심사업 하나는 상해와 천진에서 시범 사업 중인 CDMA 시설망 사업의 전국적 확대 문제였고, 또 하나는 중국 보험금융 서비스시장 진출이었는데, 상대적으로 서비스산업에 대한 발전이 늦은 중국에서 보험 산업은 특히 선점효과가 큰 사업 분야 중 하나였다.

 

당시 삼성화재는 베이징과 상해에 각각 사무소를 개설해놓고 있었지만 영업허가를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필자가 시급히 해야 할 과제 중 하나가 그 일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중국정부는 금융 산업 전반에 걸친 규제의 연장선상에서 보험문제를 보고 있었고, 외국 보험회사에 대한 영업허가 자격도 엄격했다. 하지만 수치로 계량화되지 않은 측면이 더 부담스러웠다. 즉 중국 보험 산업에 대한 기여도나 해당국 정부의 추천과 인가 등이었는데,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참고로 부임 직전에 중국의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에서 보험관리위원회가 떨어져 나왔는데, 삼성화재의 중국 내 영업허가 여부도 그곳의 결정사항이었다. 물론 최종결정은 중국정부가 하겠지만 추천은 보험관리위원회의 몫이었다. 새로 온 보험관리위원회 마영위 주석을 만나려고 여러 인맥을 통해 선을 넣어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는 만남 자체를 회피했다. 다행히 우리 쪽에서 마 주석과 친분이 있는 제3의 인물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고, 그를 통해 마 주석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중간에 다리를 놓은 사람의 체면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면담은 성사되었다. 서울에서 급히 연락을 받은 삼성화재 이수창 사장이 중국으로 날아와 첫 면담이 성사될 수 있었다.

 

만남이 성사되었다고 첫 술에 배부르겠다는 것은 욕심이었다. 우리 역시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줄 것인가를 성의 있게 준비해야 했다. 우리는 보험관리위원회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조직이기 때문이 가능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려고 노력했고, 노력은 1년여 만에 결실을 맺었다. 2000년 10월 주룽지총리가 아시아 유럽정상회의(ASEM) 참석차 서울에 왔을 때, 그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한중 정상회담에서, 한국 보험사 1개사가 중국에서 보험영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바로 삼성화재를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이었다. 얼마 후 삼성화재는 국내 보험사 최초로 중국 보험시장 영업 내인가를 받았다.

 

전 부문 흑자체제로 전환하다

삼성그룹 중국본사 마케팅 방향은 상해, 심천, 북경 등 중점 전략지역의 고소득 계층을 대상으로 한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승부하는 것이었는데, 그 출발은 브랜드 이미지 쇄신 마케팅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99년 시작된 <결국 따지고 보면 삼성입니다>라는 이미지 광고 캠페인의 효과는 놀라웠고, 그 효과는 <삼성> 전체의 브랜드가치 상승으로 이어졌다. 2000년에도 삼성전자는 <삼성 디지털 세계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는 슬로건 아래 대대적인 브랜드 이미지 캠페인에 돌입했는데, 마케팅의 모토는 <젊고 즐거운 디지털 삼성>이었다. 이와 함께 북경, 상해, 심천 등지에 삼성디지털체험관을 설립하여 디지털로드쇼를 진행했고, 국제적 전시회에도 참가하여 브랜드 마케팅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전시회에 참석한 중국 정부 고위층으로부터 삼성에서 디지털을 배우자는 평을 얻을 정도였다. 이러한 전방위적인 비즈니스 활동의 결과는 곧바로 성과로 되돌아왔다. 그 해 말 중국에 진출한 22개 삼성그룹 현지법인 전체가 흑자로 돌아섰던 것이다. 품질우위를 바탕으로 브랜드 이미지 제고와 뛰어난 마케팅 전략이 빚어낸 결과였다.

 

삼성, HIGH-END로 도약하다

2003년 기준으로 26개로 늘어난 삼성그룹의 중국 법인들은 모두 흑자를 내고 있다. 2000년 55억 달러였던 삼성의 중국 매출액이 불과 3년 만에 1백억 달러를 돌파했고, 현지 고용인원만 5만 명이 넘어섰다.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참고로 삼성하면 첨단의 프리미엄 급 HIGH-END 정보통신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구축된 것은 중국시장 공략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중국의 젊은이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휴대폰으로 애니콜을 꼽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신꾸이주(新貴族)라 불리는 중국의 고소득층은, 한국의 중산층에 비해 뒤지지 않는 경제력과 소비 수준을 가지고 있다. 올해 초 삼성전자가 중국에서 벌였던 <삼성과 함께 웰빙 라이프> 마케팅도 신꾸이주를 타깃으로 한 행사였다.

 

생산법인만 12개에 이르는 삼성전자는 이미 쑤저우에 거대한 공단을 형성하고 있고, 중국 내에서 R&D 센터, 생산라인, 판매법인(베이징, 상해)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삼성의 이러한 성과는 시작에 불과하다. 장기적으로는 현지완결형 경영체제 구축을 통해, 제2의 삼성그룹 건설을 향해 계속 전진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2010년대 삼성그룹이 중국 내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리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